프란시스코 피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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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스페인의 탐험가이자 정복자로, 잉카 제국을 정복하고 페루를 스페인 제국에 편입시킨 인물이다. 그는 사생아로 태어나 문맹으로 자랐으나, 초기 경력을 통해 남아메리카 탐험에 참여했다. 1532년 잉카 내전에서 승리한 아타우알파를 포로로 잡고 처형한 후, 쿠스코를 점령하고 리마를 건설했다. 피사로는 잉카 제국을 파괴하고 그 지역을 지배했으나, 디에고 데 알마그로와의 갈등으로 암살당했다. 그는 스페인에서는 영웅으로, 페루에서는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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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피사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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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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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칭 접두사 | 가장 뛰어난 분 |
존칭 접미사 | KOS |
이름 | 제1대 아타빌로스 후작 |
별칭 | (케추아어로 "족장") (케추아어로 "늙은 대장") |
로마자 표기 | Francisco Pizarro |
출생일 | 1478년 3월 16일경 |
출생지 | 트루히요, 카스티야 연합 왕국 |
사망일 | 1541년 6월 26일 (약 63세) |
사망지 | 리마, 누에바 카스티야 |
배우자 | 이네스 와일라스 유팡키 |
자녀 | 프란시스카 피사로 유팡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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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 | |
직위 | 초대 누에바 카스티야 총독 |
임기 시작 | 1529년 7월 26일 |
임기 종료 | 1541년 6월 26일 |
군주 | 카를 1세 |
후임 | 크리스토발 바카 데 카스트로 |
직위 2 | 누에바 카스티야 총사령관 |
임기 시작 2 | 1529년 7월 26일 |
임기 종료 2 | 1541년 6월 26일 |
군사 복무 | |
복무 기간 | 1496년–1541년 |
전투 | 페루 정복 푼타 케마다 전투 푸나 전투 카하마르카 전투 빌카콩가 전투 쿠스코 전투 |
지도 |
2. 어린 시절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스페인 에스트레마두라 트루히요에서 태어났다. 아스텍 제국을 멸망시킨 에르난 코르테스와는 6촌 관계였다.[3][4][5] 그의 아버지는 이탈리아 원정 등에 참전한 군인 곤살로 피사로였고, 어머니는 프란시스카 곤살레스였다. 피사로는 사생아로 태어나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고, 문맹으로 성장했다.[3] 그의 출생일은 불확실하지만, 1470년대, 아마도 1475년으로 추정된다.
1509년 11월, 피사로는 알론소 데 오헤다가 이끄는 탐험대에 합류하여 현재의 콜롬비아 지역으로 항해했다.[6] 이 탐험에서 그는 바스코 발보아의 선단에 합류하여 1513년에 최초로 태평양을 본 유럽인 중 한 명이 되었다.[3][8] 이러한 경험을 통해 피사로는 식민지 총독과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원주민과 가축을 관리하는 직책을 맡게 되었다.[7]
1524년과 1526년,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남아메리카 탐험을 두 차례 시도했으나, 기후와 향토병 문제로 실패했다. 파나마 총독은 피사로를 소환하려 했지만, 피사로는 탐험을 계속했다. 1528년 4월, 피사로는 북부 페루에서 원주민과 황금을 발견하고 세 번째 원정을 결심, 스페인으로 가 카를로스 1세를 설득하여 지원과 지배권을 얻었다. 1530년 파나마를 떠난 피사로는 내륙을 통해 잉카 제국 영토에 진입, 1532년 11월 아타우알파 황제를 포로로 잡았으나 1533년 처형했다. 1535년 1월, 리마를 건설했으나 디에고 알마그로와의 내분으로 알마그로는 처형당했다. 1541년 6월, 알마그로의 아들이 피사로를 살해했고, 피사로의 유해는 리마 대성당에 안치되었다.[26]
3. 초기 경력
총독 페드로 아리아스 다빌라는 발보아를 점차 싫어하게 되었고, 결국 그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총독은 피사로에게 발보아를 체포해 오라고 명령했고, 피사로는 이를 실행하여 발보아는 1519년 1월에 처형당했다.[9] 피사로는 총독에 대한 충성심을 인정받아 1519년부터 1523년까지 새로 건설된 파나마시티의 시장 겸 행정관을 역임했다.[9]
4. 남아메리카 탐험
4. 1. 남아메리카 탐험의 배경
1509년 11월,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알론소 데 오헤다가 이끄는 선단에 합류하여 현재의 콜롬비아로 항해했고, 1513년에는 발보아의 선단에 합류하여 최초로 태평양을 바라본 유럽인 중 한 명이 되었다. 피사로는 이러한 모험을 통해 식민지 총독과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같은 해에 원주민들과 가축들을 관리하는 직책을 맡았다. 이후 총독은 발보아를 점차 싫어하게 되어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피사로에게 발보아를 체포하여 데려오라고 명령한다. 피사로는 발보아를 체포하여 끌어왔고, 발보아는 1519년 1월에 사형당했다. 피사로는 총독에 대한 충성심을 인정받아 파나마시티의 시장직과 행정관 자리까지 올라갔다.
한편, 에르난 코르테스가 멕시코에서 아즈텍 제국을 정복했다는 소식은 피사로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그는 남쪽에 있다는 황금의 나라를 찾아 원정대를 꾸리게 된다.
남아메리카 서부 탐험은 1522년 파스쿠알 데 안다고야에 의해 처음 시도되었다. 안다고야가 만난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은 피루(후에 페루로 변화됨)라는 강에 있는 비루라는 금이 풍부한 지역에 대해 이야기했다.[8] 이 소식은 가르실라소 데 라 베가가 ''잉카의 왕실 기록''(1608)에서 전했다.
안다고야는 여러 원주민 추장들과 접촉했고, 에콰도르와 콜롬비아의 현재 경계선인 산 후안 강까지 도달한 후 병이 들어 파나마로 돌아왔다. 그는 "피루" – 금이 풍부한 남쪽의 훌륭한 땅(전설적인 엘도라도)에 대한 소식을 퍼뜨렸다. 이 소식은 멕시코에서 코르테스의 성공담과 함께 피사로의 관심을 끌어 남쪽 탐험을 이끌었다.
1524년, 파나마에 있던 피사로는 사제 에르난도 데 루케와 군인 디에고 데 알마그로와 동맹을 맺어 남쪽을 탐험하고 정복하기로 했다. 피사로, 알마그로, 루케는 계약을 맺고,[8] 정복할 제국을 그들 사이에 동등하게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그들은 구두로 합의했지만, 사업을 ''엠프레사 델 레반테''라 칭하고, 피사로가 탐험대를 지휘, 알마그로가 군사 및 식량 제공, 루케가 재정 및 추가 보급품을 담당하기로 결정했다.[7]
4. 2. 1차 탐험 (1524년)
에르난 코르테스가 멕시코에서 아즈텍 제국을 정복했다는 소식은 프란시스코 피사로에게 큰 영감을 주었고, 그는 남쪽에 있다는 황금의 나라를 찾아 원정대를 꾸리게 되었다. 1524년, 피사로는 첫 번째 원정대를 조직하여 남아메리카 지역으로 향했다.[8] 이 원정에는 약 80명의 병사와 4필의 말이 동원되었다.[8] 후안 데 살세도는 기수를 맡았고, 니콜라스 데 리베라는 재무관, 후안 카르발로는 감찰관이었다.[10]
디에고 데 알마그로는 병사를 모집하고 추가 보급품을 확보하여 나중에 피사로와 합류하는 임무를 맡았다. 파나마 주지사 페드로 아리아스 다빌라는 남아메리카 탐험을 원칙적으로 승인했다. 그러나 피사로의 첫 번째 원정은 악천후, 식량 부족, 적대적인 원주민들과의 충돌 등 여러 문제에 직면하여 실패로 끝났다. 특히, 알마그로는 원주민과의 충돌에서 화살에 맞아 한쪽 눈을 잃기도 했다.[7]
정복자들은 태평양 연안을 따라 항해했지만, 콜롬비아를 넘어서지 못하고 파나마로 돌아와야 했다. 그들이 항로에 붙인 지명들, 즉 '푸에르토 데세아도'(희망의 항구), '푸에르토 델 함브레'(굶주림의 항구), '푼타 케마도' 또는 '푸에블라 케마도'(불탄 항구)는 당시의 어려움을 잘 보여준다.[7] 푼타 케마다 전투와 같은 원주민과의 적대적인 만남을 우려한 피사로는 결국 첫 번째 원정을 중단하고 파나마로 귀환했다.[7]
4. 3. 2차 탐험 (1526년)
2년 후 피사로, 알마그로, 루케는 파나마 총독 페드리아스 다빌라의 허락을 받아 두 번째 원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다빌라는 니카라과 북쪽으로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피사로에 대한 신뢰를 잃은 상태였고, 다른 원정을 허락하는 것을 꺼렸지만, 세 사람은 결국 그의 신뢰를 얻어 허락을 받아냈다. 이 무렵 새로운 총독이 다빌라를 계승하기 위해 도착할 예정이었다. 페드로 데 로스 리오스가 1526년 7월 새로운 식민지 행정관으로 취임하여 피사로의 원정을 처음에 승인했다.[7]
1526년 3월 10일, 피사로는 두 척의 배와 160명의 병사, 그리고 여러 마리의 말을 이끌고 파나마를 출발하여 콜롬비아의 산 후안 강까지 항해했다. 도착 직후, 피사로는 콜롬비아의 습지대 해안가의 새롭고 위험한 지역을 탐험하기 위해 남았고, 원정의 공동 지휘관인 알마그로는 증원군을 얻기 위해 파나마로 돌아갔다. 피사로의 주요 항해사인 바르톨로메 루이스는 계속해서 남쪽으로 항해하여 적도를 넘어 항해하는 발사(뗏목)를 발견하고 나포했는데, 그 뗏목에는 툼베스 출신 원주민들이 타고 있었다. 놀랍게도 이들은 직물, 도자기류, 그리고 금, 은, 에메랄드 조각을 가지고 있었고, 이로써 루이스의 발견은 이 두 번째 원정의 중심이 되었다. 일부 원주민들은 통역으로 일하기 위해 루이스의 배에 승선했다.[7][8]
그 후 루이스는 산 후안 강으로 북상하여 새로운 지역을 탐험하는 동안 어려움에 직면하여 지친 피사로와 그의 부하들을 만났다. 곧 알마그로는 파나마에 도착한 스페인 출신의 원정대 정신을 가진 최소 80명의 증원군과 함께 보급품을 가득 실은 배를 이끌고 항구에 도착했다. 루이스의 발견과 희소식, 그리고 알마그로가 이끈 새로운 증원군은 피사로와 그의 지친 추종자들을 고무했다. 그들은 루이스가 이미 탐험한 지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강풍과 해류로 인해 어려운 항해 끝에 에콰도르 해안의 아타카메스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최근 잉카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 거대한 원주민 인구를 발견했다. 불행히도 정복자들에게, 그들이 만난 사람들은 매우 반항적이고 수적으로 많아 스페인 사람들은 육지로 들어가지 않기로 결정했다.[7]
피사로와 알마그로 사이에 많은 논쟁 끝에, 피사로는 해안 근처의 더 안전한 곳인 갈로 섬(Isla de Gallo)[8]에 머물기로 하고, 알마그로는 루케와 함께 파나마로 돌아가 증원군을 모집하기로 결정했다. 이번에는 그들이 발견한 금의 증거와 탐험한 부유한 땅에 대한 소식을 가지고서였다. 파나마의 새로운 총독 페드로 데 로스 리오스는 피사로 원정의 불운과 그와 함께 간 여러 개척민들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실패할 것을 우려하여 그는 알마그로의 추가 자원 요청을 거절했다. 게다가 그는 후안 타푸르가 지휘하는 두 척의 배를 즉시 파견하여 피사로와 그의 부하들을 파나마로 데려오라고 명령했다.[7]
피사로는 돌아갈 의향이 없었고, 타푸르가 갈로 섬에 도착했을 때, 피사로는 모래 위에 선을 긋고 이렇게 말했다. "저쪽에는 부유한 페루가 있고, 여기는 가난한 파나마가 있습니다. 용감한 카스티야인에게 어울리는 것을 각자 선택하십시오. 저는 남쪽으로 갑니다."[7]
피사로와 함께 남은 사람은 13명뿐이었다. 그들은 나중에 "명예의 13인"(''Los trece de la fama'')[8]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나머지 원정대원들은 타푸르와 함께 남았다. 루이스는 알마그로와 루케가 증원군을 모으는 노력에 합류할 의도로 배 한 척에 남았다. 배들이 떠난 직후, 피사로와 그의 부하들은 조잡한 배를 만들어 북쪽으로 25 리그 떨어진 고르고나 섬(La Isla Gorgona)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보급품이 도착하기 전까지 7개월 동안 머물렀다.[7]
파나마에서 페드로 데 로스 리오스는 (루케의 설득 끝에) 마지못해 또 다른 배를 보내는 요청을 받아들였지만, 피사로를 6개월 안에 데려오고 원정을 완전히 포기하는 조건이었다. 알마그로와 루케는 기회를 잡고 (이번에는 새로운 신병 없이) 파나마를 떠나 다시 한번 피사로와 합류하기 위해 고르고나 섬으로 향했다. 피사로를 만난 후, 동료들은 루이스의 인디언 통역관의 권고에 따라 남쪽으로 항해하기로 결정했다.[7]
1528년 4월까지, 그들은 마침내 페루 북서부 툼베스 주에 도착했다. 툼베스는 스페인인들이 오랫동안 원했던 첫 번째 성공이 되었다. 그들은 현지 주민인 툼피스로부터 따뜻한 환대와 보급품을 받았다. 그 후 며칠 동안 피사로의 부하 두 명인 알론소 데 몰리나와 페드로 데 칸디아가 그 지역을 정찰했고, 둘 다 별도로 보고서를 통해 그 땅의 부를 보고했다. 그 보고서에는 족장의 거주지 주변의 은과 금 장식과 모든 사람들로부터 받은 호의적인 환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스페인인들은 또한 페루의 라마[8]를 처음으로 보았는데, 피사로는 이를 "작은 낙타"라고 불렀다. 피사로는 그들이 탐험하고 있는 땅을 다스리는 강력한 군주에 대한 같은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원정대가 툼베스에서 보여준 부와 권력이 페루 영토의 부의 한 예라는 것을 확신시키는 증거가 되었다. 정복자들은 더 많은 신병과 보급품을 가지고 최종 정복 원정을 준비하기 위해 파나마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떠나기 전에 피사로와 그의 추종자들은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항해하여 관심 있는 것이 있는지 확인했다. 역사가 윌리엄 H. 프레스콧은 그들이 카보 블랑코, 파이타 항, 세추라, 아구하 곶, 산타 크루스, 트루히요(몇 년 후 알마그로가 건설)와 같은 이름의 영토를 지나간 후, 마침내 남아메리카 남위 9도에 처음으로 도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파나마로 돌아가는 길에 피사로는 잠시 툼베스에 들렀는데, 그곳에서 그의 부하 두 명이 원주민들의 관습과 언어를 배우기 위해 남기로 결정했다. 피사로는 또한 스페인어를 배우기 위해 페루 소년 두 명을 받았는데, 그중 한 명은 나중에 펠리필로로 세례를 받고 중요한 통역관으로 일했는데, 이는 멕시코의 코르테스의 말린체와 같은 역할을 했다. 다른 한 명은 마르티닐로였다.[10] 그들의 마지막 정착지는 고르고나 섬이었는데, 그곳에는 병든 그의 부하 두 명(한 명은 사망)이 머물렀다. 최소 18개월 만에 피사로와 그의 추종자들은 파나마 해안에 정박하여 최종 원정을 준비했다.[7]
4. 4. 스페인 왕실의 지원
1528년 피사로는 스페인으로 돌아와 카를 1세에게 페루 지배 허가를 받았다. 그는 정복권, 착취 특권, 귀족 작위를 얻고 es 총독에 임명되었다.[25]
피사로는 초여름에 세비야에 도착했다. 톨레도에 있던 카를 1세는 피사로와 면담을 갖고 남아메리카에서의 그의 원정에 대해 들었다. 피사로는 그와 그의 추종자들이 "카스티야 제국의 확장을 위해" 용감하게 탐험한 지역이 금과 은이 풍부하다고 묘사했다. 국왕은 그의 이야기에 감명을 받고 페루 정복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다. 이사벨 여왕은 1529년 7월 6일 톨레도 조약[11]에 서명했는데, 이는 피사로가 페루 정복을 진행하도록 허가하는 문서였다. 피사로는 공식적으로 신카스티야의 총독, 총사령관, ''아델란타도'', 그리고 ''알구아실 마요르''로 임명되었으며, 새로 발견된 해안을 따라 200리그에 이르는 지역에 대한 모든 권한과 특권을 부여받았다.[7]
이후 피사로는 그의 형제들과 동료들을 모아 1530년 파나마로 돌아와[25] 페루 원정을 준비했다.
5. 잉카 제국 정복 (1532년 ~ 1535년)
에르난 코르테스가 아즈텍 제국을 정복했다는 소식은 프란시스코 피사로에게 큰 영감을 주어, 남쪽에 있다는 황금의 나라를 찾아 원정에 나서게 했다. 1524년과 1526년에 남아메리카 지역으로 원정을 떠났으나, 기후 문제와 질병으로 인해 후퇴해야 했다.
파나마 총독은 피사로를 소환하려 했지만, 그는 이를 거부하고 모험을 계속했다. 1528년 4월, 북부 페루 지방에서 원주민들과 황금을 발견한 피사로는 세 번째 원정을 결심하고 파나마로 돌아가 총독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총독이 이를 거절하자, 피사로는 스페인으로 건너가 카를로스 1세를 설득하여 지원 부대와 점령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얻었다. 1530년, 피사로는 가족과 친구들을 모아 파나마를 떠났다.
해안가에는 적대적인 세력이 많아 피사로는 내륙을 통해 식민지를 개척했다. 잉카 제국 영토에 진입한 후, 1532년 11월 아타우알파 황제를 포로로 잡았다. 아타우알파는 방 하나를 가득 채울 만큼의 황금을 바치는 조건으로 목숨을 구걸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지만, 1533년 피사로는 약속을 어기고 아타우알파를 처형했다.[26]
이후 피사로는 1535년 1월 현재 페루의 수도인 리마를 건설했으며, 이를 자신의 최대 업적으로 평가했다.
5. 1. 잉카 제국 침공
1531년, 피사로는 에콰도르 근처 해안, 코아케 주와 에스메랄다스 지역에 상륙하여 금, 은, 에메랄드를 확보한 후 알마그로에게 보냈다. 알마그로는 파나마에서 병력을 모으고 있었다.[7] 세바스티안 데 벨알카사르가 30명의 병사를 이끌고 도착했고,[7] 얼마 후 에르난도 데 소토가 100명의 자원병과 말을 이끌고 합류하여 툼베스로 향했으나, 그곳은 이미 버려진 상태였다.[7] 툼베스의 추장들은 푸니아의 부족들이 그들을 공격하여 약탈했다고 설명했다.[7]툼베스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자, 피사로는 1532년 5월 내륙으로 원정을 이끌고 페루 최초의 스페인 식민지인 산미구엘 데 피우라를 설립했다.[7]
피사로는 50명의 병사를 남겨두고, 1532년 9월 24일 2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정복을 계속했다.[7] 자란에 도착한 후, 데 소토는 카사스에 페루 주둔지를 정찰하도록 파견되었다. 일주일 후, 그는 잉카의 사절로부터 선물과 함께 잉카 황제의 막사를 방문하라는 초대를 받았다.[7]
잉카 내전에서 승리한 아타왈파는 카하마르카 근처 온천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1532년 11월 15일, 피사로는 보병 110명, 기병 67명, 아르케부스 3정, 팔코넷 2문으로 구성된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카하마르카에 도착했다. 그는 에르난도 피사로와 데 소토를 보내 아타왈파와 만나게 했다. 아타왈파는 다음 날 카하마르카 광장에서 피사로를 만나기로 동의했다. 도미니크 수도사 빈센테 데 발베르데와 원주민 통역관 펠리필로가 아타왈파에게 접근하여 "진정한 신앙"과 카를 5세 황제에게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하자, 아타왈파는 "나는 어떤 사람의 신하도 되지 않겠다"라고 대답했다. 200명도 채 안 되는 스페인 병사들만 남아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한 그의 자만심은 그의 운명과 잉카 제국의 운명을 결정지었다.[7]

아타왈파가 거부하자 피사로와 그의 병력은 1532년 11월 16일 카하마르카 전투에서 잉카 군대를 공격했다. 스페인군은 승리했고, 피사로는 아타왈파의 12명의 명예 근위병을 처형하고 잉카 황제를 포로로 잡았다. 1533년 2월까지 알마그로는 150명의 병사와 50필의 말을 이끌고 카하마르카에 있는 피사로와 합류했다.[7]
아타왈파는 금으로 방 하나[13]와 은으로 방 두 개를 채우겠다는 약속을 이행했음에도 불구하고, 12가지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1533년 8월 29일 가로테로 처형되었다. 프란시스코 피사로와 데 소토는 아타왈파의 처형에 반대했지만, 프란시스코는 특히 알마그로에 의해 "병사들 사이에 큰 소란"이 있었기 때문에 재판에 동의했다.[7][14] 카를 왕은 나중에 피사로에게 "우리는 아타왈파의 죽음에 불쾌감을 느꼈다. 그는 군주였고, 특히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졌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피사로는 500명의 스페인 병사를 이끌고 쿠스코로 진군했다. 만코 잉카 유판키는 투팍 우알파 사후 피사로에 합류했다.[7] 쿠스코 탐험 중 피사로는 그의 장교들을 통해 스페인의 카를 1세 왕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이 도시는 이 나라 또는 인디언 어디에서도 본 것 중 가장 크고 가장 훌륭한 도시입니다... 폐하께서는 이 도시가 매우 아름답고 훌륭한 건물을 가지고 있어 스페인에서도 주목할 만하다고 확신하실 수 있습니다."
스페인은 1533년 11월 15일 쿠스코에 입성하여 페루 정복을 확정했다.[7] 비옥한 만타로 계곡에 있는 하우하는 1534년 4월 페루의 임시 수도로 설립되었지만,[10] 산악 지대에 위치해 수도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피사로는 1535년 1월 6일 페루 중앙 해안에 리마를 건설했는데, 그는 이것을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로 여겼다.[7]
1536년 초, 만코 잉카는 10만 명에 달하는 군대의 지원을 받아 쿠스코를 포위했다. 동시에 소규모 잉카 원정대가 다른 유럽 요새를 파괴하기 위해 이동했다. 3년간의 전쟁에서 잉카 군 지휘관들은 스페인의 군사 전술에 익숙해졌고 효과적인 대응책을 개발했다. 잉카 병사들은 기병 돌격 전에 후퇴하여 유럽인들을 협곡으로 유인하고, 미리 배치된 병력이 바위와 미사일 무기를 이용하여 그들을 압도할 수 있도록 했다. 대부분의 전투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화약 무기를 사용하는 200명의 전투원만으로 방어되고 있는 쿠스코 요새를 잉카군이 압도할 수 없었던 것은 스페인군의 결정적 승리를 의미했다.
잉카가 쿠스코를 탈환하기 위한 최종 시도가 알마그로에 의해 실패한 후, 피사로와 알마그로는 쿠스코 시에 대한 관할권의 경계를 놓고 분쟁을 벌였다. 스페인 국왕은 알마그로에게 누에바 톨레도 총독령을, 피사로에게 누에바 카스티야 총독령을 수여했다. 이 분쟁은 총독령 간의 경계를 해석하는 방법에 대한 의견 차이에서 비롯되었다.[7] 이는 피사로 형제와 알마그로 사이의 충돌로 이어졌고, 알마그로는 결국 라스 살리나스 전투(1538)에서 패배하여 처형되었다. 알마그로의 아들인 디에고는 후에 피사로에 의해 토지를 빼앗기고 파산했다.
5. 2. 아타우알파와의 만남과 카하마르카 전투
1528년 스페인으로 돌아온 피사로는 카를로스 1세(이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에게 페루 지배를 허가받았다. 정복권, 착취 특권, 귀족 작위를 얻고 es 총독에 임명된 그는 네 명의 형제들과 병사들을 모집하여 1530년 파나마로 돌아왔다.[25]1531년 피사로는 약 180명의 병력과 37마리의 말을 이끌고 파나마를 출항, 페루 침입을 시작했다. 산 마테오 섬에서 기병대를 상륙시켜 툼베스까지 남하하여 산 미겔 데 피우라를 건설했다. 이후 잉카 황제 아타왈파를 추격하며 남진했다.
1532년 카하마르카에서 아타왈파와 만난 피사로는 현장에서 그를 생포했다.[24] 당시 잉카 내전에서 형 와스카르를 물리친 아타왈파는 페루 북부 시에라의 카하마르카 근처, 잉카 목욕탕으로 알려진 온천 근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같은 해 11월 15일 카하마르카에 도착한 피사로는 보병 110명, 기병 67명, 아르케부스 3정, 팔코넷 2문으로 구성된 소규모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다.[7] 그는 에르난도 피사로와 데 소토를 파견하여 아타왈파와 그의 막사에서 만나게 했다. 아타왈파는 다음 날 카하마르카 광장 요새에서 피사로를 만나기로 동의했다.
카하마르카 전투에서 피사로와 그의 병력은 아타왈파의 거부로 인해 잉카 군대를 공격했다. 스페인군은 승리했고, 피사로는 아타왈파의 12명의 명예 근위병을 처형하고 잉카 황제를 포로로 잡았다. 1533년 2월까지 알마그로는 추가로 150명의 병사와 50필의 말을 이끌고 카하마르카에 있는 피사로와 합류했다.[7]
아타왈파는 방(22by) 하나를 금으로, 두 개의 방을 은으로 채우겠다는 약속을 이행했음에도 불구하고, 1533년 8월 29일 가로테로 처형되었다.[7][14] 그는 형을 죽이고 피사로와 그의 병력에 반란을 모의한 것을 포함한 12가지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아타우알파는 자신을 “태양의 아들”이라고 믿고 언젠가 부활하여 복수할 것을 맹세하며 죽었다고 한다.
5. 3. 아타우알파의 처형
아타우알파는 피사로에게 방을 가득 채울 만큼의 황금을 주는 조건으로 자신을 살려줄 것을 빌었고, 실제로 그렇게 하였다. 그러나 피사로는 약속을 어기고 1533년에 아타우알파를 처형했다.[26] 아타우알파는 그의 형을 죽이고 피사로와 그의 병력에 반란을 모의한 것을 포함하여 12가지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7] 그는 1533년 8월 29일 가로테로 처형되었다. 프란시스코 피사로와 에르난도 데 소토는 아타우알파의 처형에 반대했지만, 프란시스코는 특히 알마그로에 의해 "병사들 사이에 큰 소란"이 있었기 때문에 재판에 동의했다. 데 소토는 재판과 처형 당일 정찰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고, 돌아와서 "그는 카스티야로 데려가 황제에게 재판을 받았어야 했다"고 말하며 실망감을 표했다.[14] 카를 5세는 나중에 피사로에게 "우리는 아타왈파의 죽음에 불쾌감을 느꼈다. 그는 군주였고, 특히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졌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아타우알파는 자신을 “태양의 아들”이라고 믿고 언젠가 부활하여 복수할 것을 맹세하며 죽었다고 한다.5. 4. 쿠스코 점령과 리마 건설
툼베스가 더 이상 안전한 거처를 제공하지 못하자, 피사로는 1532년 5월 내륙으로 원정을 이끌고 페루 최초의 스페인 식민지인 산미구엘 데 피우라를 설립했다.[7]
안토니오 나바로의 지휘 아래 50명을 식민지에 남겨둔 피사로는 1532년 9월 24일 2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정복을 계속했다.[7] 자란(Zaran)에 도착한 후, 데 소토는 카사스(Caxas)의 페루 주둔지로 파견되었다. 일주일 후, 그는 잉카 자신이 보낸 사절과 선물, 그리고 잉카 황제의 막사를 방문하라는 초대를 받고 돌아왔다.[7]
잉카 내전에서 그의 형 와스카르를 물리친 아타왈파는 페루 북부 시에라의 카하마르카 근처, 오늘날 잉카 목욕탕으로 알려진 온천 근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1532년 11월 15일 카하마르카에 도착한 피사로는 보병 110명, 기병 67명, 아르케부스 3정, 팔코넷 2문으로 구성된 소규모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는 에르난도 피사로와 데 소토를 파견하여 아타왈파와 그의 막사에서 만나게 했다. 아타왈파는 다음 날 그의 카하마르카 광장 요새에서 피사로를 만나기로 동의했다. 도미니크 수도사 빈센테 데 발베르데와 원주민 통역관 펠리필로가 카하마르카 중앙 광장에서 아타왈파에게 접근했다. 도미니크 수도사가 "진정한 신앙"과 카를 5세 황제에게 조공을 바칠 필요성을 설명하자, 아타왈파는 "나는 어떤 사람의 신하도 되지 않겠다"라고 대답했다. 그의 자만심, 즉 5만 명의 군대(그중 6천 명이 카하마르카에 그와 함께 왔다)와 달리 200명도 채 안 되는 스페인 병사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그의 운명과 잉카 제국의 운명을 결정지었다.[7]
아타왈파의 거부로 피사로와 그의 병력은 1532년 11월 16일 카하마르카 전투에서 잉카 군대를 공격했다. 스페인군은 승리했고, 피사로는 아타왈파의 12명의 명예 근위병을 처형하고 소위 몸값 방에서 잉카 황제를 포로로 잡았다. 1533년 2월까지 알마그로는 추가로 150명의 병사와 50필의 말을 이끌고 카하마르카에 있는 피사로와 합류했다.[7]
금으로 하나의 방(22by)과 은으로 두 개의 방을 채우겠다는 약속을 이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아타왈파는 그의 형을 죽이고 피사로와 그의 병력에 반란을 모의한 것을 포함하여 12가지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1533년 8월 29일 가로테로 처형되었다. 프란시스코 피사로와 데 소토는 아타왈파의 처형에 반대했지만, 프란시스코는 특히 알마그로에 의해 "병사들 사이에 큰 소란"이 있었기 때문에 재판에 동의했다. 데 소토는 재판과 처형 당일 정찰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고, 돌아와서 "그는 카스티야로 데려가 황제에게 재판을 받았어야 했다"고 말하며 실망감을 표했다.[7][14] 카를 왕은 나중에 피사로에게 "우리는 아타왈파의 죽음에 불쾌감을 느꼈다. 그는 군주였고, 특히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졌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피사로는 아타왈파를 지지했던 북부의 주요 잉카 장군 중 한 명인 찰쿠치마크와 함께 500명의 스페인 병사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쿠스코로 진군했고, 찰쿠치마크는 후에 화형당했다. 만코 잉카 유판키는 투팍 우알파 사후 피사로에 합류했다.[7] 쿠스코 탐험 중 피사로는 감명을 받아 그의 장교들을 통해 스페인의 카를 1세 왕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이 도시는 이 나라 또는 인디언 어디에서도 본 것 중 가장 크고 가장 훌륭한 도시입니다... 폐하께서는 이 도시가 매우 아름답고 훌륭한 건물을 가지고 있어 스페인에서도 주목할 만하다고 확신하실 수 있습니다."
스페인은 1533년 11월 15일 쿠스코에 입성하여 페루 정복을 확정했다.[7] 비옥한 만타로 계곡에 있는 하우하는 1534년 4월 페루의 임시 수도로 설립되었지만, 산악 지대에 위치해 바다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수도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피사로는 1535년 1월 6일 페루 중앙 해안에 리마를 건설했는데, 그는 이것을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로 여겼다.[7]
6. 내분과 죽음
에르난 코르테스가 아즈텍 제국을 정복했다는 소식은 피사로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남쪽에 황금의 나라가 있다는 정보를 듣고 원정대를 꾸렸다. 1524년과 1526년에 남아메리카로 원정을 떠났지만, 기후와 풍토병 때문에 후퇴해야 했다.[26]
파나마 총독은 피사로를 다시 부르려 했지만, 피사로는 이를 거부하고 탐험을 계속했다. 1528년 4월, 북부 페루 지방에 도착하여 원주민들과 황금을 발견했다. 이에 세 번째 원정을 결심한 피사로는 파나마로 돌아가 총독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피사로는 스페인으로 건너가 카를로스 1세를 설득하여 지원 부대와 점령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얻어냈다. 1530년, 가족과 친구들을 모아 파나마를 떠났다.[26]
해안가에는 적대적인 세력이 많아 내륙을 통해 식민지를 개척했다. 잉카 제국 영토에 진입한 피사로는 1532년 11월, 아타우알파 황제를 포로로 잡았다. 아타우알파는 방 하나를 가득 채울 만큼의 황금을 주는 조건으로 석방을 요구했고 실제로 황금을 제공했지만, 1533년 피사로는 그를 처형했다. 1535년 1월, 피사로는 현재 페루의 수도인 리마를 건설했고, 이를 자신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했다.[26]
6. 1. 디에고 데 알마그로와의 갈등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디에고 데 알마그로와 함께 잉카 정복에 참여했다. 그러나 피사로는 알마그로와 갈등을 빚었고, 결국 전투까지 벌였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알마그로는 포로로 잡혀 처형되었다.[26]6. 2. 피사로의 암살
1541년 6월 26일 리마에서, "디에고 데 알마그로 2세(Diego de Almagro II) '엘 모소'(el mozo)"를 지지하는 20명의 중무장한 사람들이 피사로의 궁전을 급습하여 그를 암살하고, 공포에 질린 시의회를 강제로 압박하여 젊은 알마그로를 페루의 새로운 총독으로 임명하게 만들었다.[16] 피사로의 손님들 대부분은 도망쳤지만, 일부는 침입자들과 싸웠다. 침입자의 수는 7명에서 25명으로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다. 피사로가 가슴 흉갑을 착용하려고 애쓰는 동안, 그의 이복형제인 마르틴 데 알칸타라(Martín de Alcántara)를 포함한 그의 수비대원들이 살해당했다.[10] 피사로는 두 명의 공격자를 죽이고 세 번째 공격자를 찔렀다. 그는 쓰러지면서 피로 바닥에 십자가를 그렸고, 그 십자가에 입맞춘 후 죽었다고 한다. 그의 유해에 대한 현대 법의학 검사 결과, 피사로는 머리와 목에 여러 차례 칼에 찔린 상처와 손과 팔에 방어적인 상처를 입고 잔혹하게 공격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17]피사로의 유해는 잠시 대성당 안뜰에 매장되었고, 나중에 그의 머리와 시신은 분리되어 대성당 바닥 아래 별도의 상자에 묻혔다. 18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기념일을 준비하면서, 피사로의 유해로 여겨지는 시신이 발굴되어 유리 관에 전시되었다. 그러나 1977년, 대성당 기초 공사를 하던 사람들이 밀봉된 벽감에서 "여기 페루 왕국을 발견하고 정복하여 카스티야 왕관에 바친 마르케스 돈 프란시스코 피사로(Marquess Don Francisco Pizarro)의 머리가 있다"는 비문이 새겨진 납 상자를 발견했다. 윌리엄 R. 메이플스(William R. Maples)가 이끄는 미국 법의학자 팀이 두 시신을 검사하도록 초청받았고, 그들은 거의 한 세기 동안 유리 관에 보관되었던 시신이 잘못 식별되었다는 것을 곧 알아냈다. 납 상자 안의 두개골에는 여러 칼에 맞은 흔적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특징은 생전의 초상화와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18][19]

7. 평가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잉카 제국을 정복한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로, 그의 평가는 스페인과 페루에서 크게 다르다. 피사로는 잉카 제국을 파괴하고 지역 문화를 쇠퇴시켰으며, 원주민들을 농노제로 전락시키고 다신교를 기독교로 대체했다. 또한 몸값을 받고도 아타우알파를 처형한 것으로 비난받는다.[20]
7. 1. 스페인에서의 평가
피사로는 침략 이후 잉카 제국을 파괴하고, 거의 10년 동안 그 지역을 지배하면서 지역 문화의 쇠퇴를 초래했다. 잉카의 다신교는 기독교로 대체되었고, 많은 지역 주민들은 스페인 엘리트 계급 아래 농노제로 전락했다. 잉카 제국의 도시들은 스페인 가톨릭 도시로 변모했다. 피사로는 또한 몸값 지불에도 불구하고 아타우알파의 죽음을 명령한 것으로 비난받는다.[20] 특히 원주민 출신 페루인들은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지만, 비교적 최근까지 피사로는 교황청을 도입하고 주로 스페인계 특권 계급을 창출한 것으로 묘사되었다.스페인에서는 영웅으로 여겨지며, 1992년부터 2002년 유로(Euro) 도입까지 발행되었던 마지막 1000페세타(Peseta) 지폐 뒷면에 초상이 사용되었다(앞면은 에르난 코르테스였다).

7. 2. 페루에서의 평가
피사로는 침략 이후 잉카 제국을 파괴하고, 거의 10년 동안 그 지역을 지배하면서 지역 문화의 쇠퇴를 초래했다. 잉카의 다신교는 기독교로 대체되었고, 많은 지역 주민들은 스페인 엘리트 계급 아래 농노제로 전락했다. 잉카 제국의 도시들은 스페인 가톨릭 도시로 변모했다. 피사로는 또한 몸값 지불에도 불구하고 아타우알파의 죽음을 명령한 것으로 비난받는다.[20] 특히 원주민 출신 페루인들은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지만, 비교적 최근까지 피사로는 교황청을 도입하고 주로 스페인계의 특권 계급을 창출한 것으로 묘사되어 긍정적으로 평가되었다.페루에서는 리마 건설 400주년을 기념하여 1935년 피사로의 고향인 스페인 에스트레마두라에서 리마 시에 기증된 피사로의 기마상이 처음에는 대성당 앞에 세워졌으나, 시민들의 반발로 1952년에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통령궁 앞 알마스 광장(Plaza de Armas) 구석으로 옮겨졌다. 이후 1990년대에 다시 반대 운동이 일어나 2004년 리마 시장의 명령으로 "국민 감정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는 페루 국기가 게양되었다. 기마상은 현재 리마 시내 구시가지 리마크 강(Río Rímac)변의 성채 광장(Plaza de la Fortaleza)에 받침대 없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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